March 27, 2011

sade lovers live











 05년, 카트만두 어느 거리에서 Sade의 복제 cd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옆의 Sinead O'Connor와 함께.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섹스가 하고 싶다.

Taxi Driver, Martin Scorsese, Jodie Foster in 1976




















March 24, 2011

March 21, 2011

번민하는 밤. 목소리가 듣고 싶다.

March 18, 2011

· 지난 몇 달 동안 나오지 않던 TV가 수리되었다. 위성을 건너 도착하는 채널은 한 가지, YTN 뿐. 오늘 뉴스엔 폭설로 인하여 차가 밀리는 올림픽대로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난 잠시 눈을 감고 떠올렸다.

· 기지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다.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 쑥쑥 추워진다. 해가 짧아진다. 겨울은 날카로운 꼬챙이처럼 하루를 꿰어간다.

March 10, 2011

2

태양의 활동이 가장 강한 시기라고들 했다. 어쩌면 오늘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들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호기롭게 말을 뱉었다.

-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이 곳에 좀 더 있어도 좋아.
- 좀 더?
- 길게는 6개월 정도.
- 글쎄.

신하의 마음으로 밤을 맞았다. 제법 추운 밤이었다. 구름은 없었다. 바람은 언제나처럼 강했고, 그 사이로 먼 짐승의 꿈이 언뜻 보이는 듯도 하였다. 

그렇게 유성을 몇 번인가 흘려보냈다. 
낡은 의자에 파묻히면 소리로 응답한다. 마치 사람의 울음 같다.

March 8, 2011

Pulchra sunt quae visa placent.

March 7, 2011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만일 '내가 존재하는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정감과 동일성의 감각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나의 중심은 내 속에 있다. 나의 '존재' 능력과 스스로의 본질적인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나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며, 물론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병이나 고문, 그 밖의 강력한 외적 제한이 가해지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는 실천에 의해 성장한다. 이성(理性)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쓰여지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고 반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 존재에 있어서의 안정감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 속에 있다. 즉 생명과 자기의 생산적인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 속에, 퇴보적 경향 속에, 내적 나태와 자진하여 다른 사람에게 내 생명을 양보하려고 하는 속에 그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잃어버릴 위험이 소유에 내재하고 있듯이 이들 위협이 존재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p153

불타는 떨기나무

  그러나 소유에 의한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전진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찬양한다. 신화에서 이런 생존 양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자는 '영웅'이다. 영웅이란 그들이 가진 것―토지, 가족, 재산―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교의 전통 속에서는 불타가 영웅이며, 그는 모든 소유물, 힌두교 신학에 포함된 모든 확신―그리고 신분. 가족―을 버리고 집착을 갖지 않는 생활을 향하여 나아간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유태교 전통 속의 영웅이다. 기독교의 영웅은 예수이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그리고―세상 사람들의 눈에는―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인류에 대한 충만한 사랑에서 행동한 영웅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세속적인 영웅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승리요 그들의 자부심의 만족이며 정복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스와 오딧세우스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험과 위험에 기가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동화에 나오는 영웅들도 같은 기준, 즉 버리는 것, 전진하는 것 그리고 불확실한 일을 견디는 것에 합치하고 있다. 우리가 이들 영웅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태도야말로 우리가―만일 가능하다면―바라는 생활태도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생활태도가 불가능하며 영웅만이 가능하다고 믿어버린다. 영웅은 우상이 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우리 자신은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문다―"우리는 영웅이 아니므로." -p151
테니슨 - 괴테 - 바쇼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의 기능은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촉진시키는 일인데, 새로운 '인간'이란 다음에 드는 자질(資質)을 보여주는 성격 구조를 지닌 존재이다.

  (1)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의 형태를 자진하여 포기하려는 의지.
  (2) 안정감, 동일성의 의식, 자신감. 이것들의 기초는 자기의 '존재'요, 밀접한 관계, 관심, 사랑, 주변 세계와의 연대에 대한 요구이며,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소유물의 노예가 되려는 욕구는 아니다.
  (3) 자기 이외의 어떠한 인간이나 사물도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철저한 독립성과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 동정과 나누어 갖는 일에 전력하는 가장 완전한 능동성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용인함.
  (4) 자기가 지금 있는 곳에 완전히 존재함.
  (5) 저축과 착취하는 데서가 아니라 주고 나누어 갖는 데서 오는 기쁨.
  (6) 생명의 모든 현상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것은 물건과 권력과 모든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그 성장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신성(神聖)하다는 지식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7) 탐욕, 미움, 환상을 가능한 한 줄이도록 애씀.
  (8)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환상을 품지 않으며 생활함. 그것은 이미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9) 사랑의 능력을 비판적이고 냉철한 사고능력과 함께 발달시킴.
  (10) 자기도취(나르시시즘)를 버리고 인간생존에 내재하는 비극적 한계를 용인함.
  (11) 자기와 동포의 완전한 성장을 삶의 지고(至高)의 목적으로 삼음.
  (12)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양과 현실의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앎.
  (13) 또한 어떠한 성장도 그것이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앎. 그러나 또 생명의 속성으로서의 구조와 비(非)생명(no-life), 즉 죽은 자의 속성으로서의 '질서'의 차이도 앎.
  (14) 상상력을 개발함. 그것도 견딜 수 없는 환경으로부터의 도피로서가 아니라 현실적 가능성의 예측으로서, 견딜 수 없는 환경을 제거하는 수단으로서.
  (15)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음.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속지도 않음. 천진하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순하다고는 말할 수 없음.
  (16) 자기 자신을 알고 있음.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자기까지도―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지식 밖에 가질 수 없을지 모르지만.
  (17) 자신이 모든 생명체와 하나임을 인식함. 그리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고, 약탈하고, 파괴한다는 목표를 포기하고 오히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력하도록 애씀.
  (18) 방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유. 탐욕스러운 욕망의 덩어리가 아니라 언제나 성장이냐 쇠퇴냐, 삶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는,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구조로서의 자유.
  (19) 사악함과 파괴성은 성장에 실패함으로써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임을 앎.
  (20) 이 모든 자질의 완성에 도달한 사람들은 단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꼭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야심은 없음. 그와 같은 야심도 탐욕과 소유의 형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21)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항상 성장하는 삶의 과정에서 행복을 찾아냄. 그 이유는 가능한 한 완전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달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만족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p227

지금, 여기―과거, 미래

  존재양식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존재한다. 소유양식은 다만 시간 속에만, 즉 과거, 현재, 미래 속에만 존재한다.
  소유양식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축적한 것, 즉 돈, 토지, 명성, 사회적 지위, 지식, 자녀, 기억 등에 얽매인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의 감정(혹은 감정처럼  보이는 것)을 '상기(想起)함'으로써 느낀다(이것이 감상[感傷]의 본질이다). 우리는 과거'이다'. 우리는 "나는 과거의 나다(I am what I was)"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는 이윽고 과거가 될 것에 대한 예측이다. 그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소유양식으로 경험되고 "이 사람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 의미는 그 혹은 그녀는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윽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드(Ford) 회사가 광고로 쓰고 있는 표어는 "당신의 미래에는 포드가 있다"이며, 이 말은 미래의 '소유'를 강조한 것이다. 마치 어떤 상거래에서 '선물(先物)'거래를 하고 있듯이. 소유의 기본적 경험은 과거를 다루든, 미래를 다루든 마찬가지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점이다. 시간의 경계역(境界驛)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결하는 두 영역과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
  존재는 반드시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 캔버스, 붓과 씨름해야 하며, 조각가는 돌, 끌과 씨름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행위, 그들이 창조하려는 것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한 순간에, 혹은 여러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비전 속에선 시간이 경험되지 않는다. 사상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사상을 적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사상을 마음에 품는 것은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사건이다. 이것은 존재의 모든 현상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지금 여기는 영원이다.' 즉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은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무한히 잡아늘인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관계에 대해서 한 가지 중요한 한정을 가해야만 한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과거를 상기하고,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반추(反芻)하는 것이었다. 과거를 '소유하는' 이 양식에 있어서는 과거는 죽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되살아나게 할 수도 있다. 과거의 상황을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신선하게 경험할 수가 있다. 즉 과거를 재창조할 수 있으며 되살릴 수 있다(상징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는 과거이기를 중지하고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미래도 또한 그것이 마치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경험할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상태가 너무나도 완전하게 우리 경험 속에서 예측되기 때문에 미래가 '객관적으로', 즉 외적 사실로서만 미래일 뿐 주관적 경험으로서는 미래가 아닐 때 생긴다.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사고(유토피아적 백일몽과는 대조적인)의 본질이며 진정한 신념, 즉 미래를 현실로서 경험하기 위해 '미래의' 외부적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념의 기초이다.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의 모든 개념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 즉 제한된 인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육체의 요구,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해야만 하는 자연계의 본질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어야 할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남, 성장과 노화의 리듬, 노동으로써 세계를 세울 필요성과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성,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면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한다. 육체는 또한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도록 한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존재양식에서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시간에 굴복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시간의 존중이 소유양식이 지배할 때에는 '굴복으로 변한다'. 이 양식에서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존재양식에서는 시간은 왕위(王位)를 상실하고, 이미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지 못한다. -p174

Legends of jazz with Ramsey Lewis



Al Jarreau & Kurt Elling "Take Five"


Chris Botti "My Funny Valentine"

Marcus Miller, Lee Ritenour, George Duke "Panther"



David Sanborn & Phil Woods "Senor Blues"



Chick Corea "Armando's Rhumba"




Robert Cray & Keb' Mo' "The 12 Year Old Boy"




Benny Golson "Killer Joe"


Ivan Lins "The Island"


Clark Terry "Mumbles"


Jane Monheit & John Pizzarelli "They Can't Take That Away From Me"



Dave Valentin "Obsession"


Dave Brubeck & Billy Taylor "Take The 'A' Train"







Ramsey Lewis "Dear L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