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7, 2011

지금, 여기―과거, 미래

  존재양식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존재한다. 소유양식은 다만 시간 속에만, 즉 과거, 현재, 미래 속에만 존재한다.
  소유양식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축적한 것, 즉 돈, 토지, 명성, 사회적 지위, 지식, 자녀, 기억 등에 얽매인다.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의 감정(혹은 감정처럼  보이는 것)을 '상기(想起)함'으로써 느낀다(이것이 감상[感傷]의 본질이다). 우리는 과거'이다'. 우리는 "나는 과거의 나다(I am what I was)"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는 이윽고 과거가 될 것에 대한 예측이다. 그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소유양식으로 경험되고 "이 사람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그 의미는 그 혹은 그녀는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윽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드(Ford) 회사가 광고로 쓰고 있는 표어는 "당신의 미래에는 포드가 있다"이며, 이 말은 미래의 '소유'를 강조한 것이다. 마치 어떤 상거래에서 '선물(先物)'거래를 하고 있듯이. 소유의 기본적 경험은 과거를 다루든, 미래를 다루든 마찬가지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점이다. 시간의 경계역(境界驛)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결하는 두 영역과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
  존재는 반드시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 캔버스, 붓과 씨름해야 하며, 조각가는 돌, 끌과 씨름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행위, 그들이 창조하려는 것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한 순간에, 혹은 여러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비전 속에선 시간이 경험되지 않는다. 사상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사상을 적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사상을 마음에 품는 것은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사건이다. 이것은 존재의 모든 현상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지금 여기는 영원이다.' 즉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은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무한히 잡아늘인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관계에 대해서 한 가지 중요한 한정을 가해야만 한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과거를 상기하고,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반추(反芻)하는 것이었다. 과거를 '소유하는' 이 양식에 있어서는 과거는 죽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되살아나게 할 수도 있다. 과거의 상황을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신선하게 경험할 수가 있다. 즉 과거를 재창조할 수 있으며 되살릴 수 있다(상징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는 과거이기를 중지하고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미래도 또한 그것이 마치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경험할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상태가 너무나도 완전하게 우리 경험 속에서 예측되기 때문에 미래가 '객관적으로', 즉 외적 사실로서만 미래일 뿐 주관적 경험으로서는 미래가 아닐 때 생긴다.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적 사고(유토피아적 백일몽과는 대조적인)의 본질이며 진정한 신념, 즉 미래를 현실로서 경험하기 위해 '미래의' 외부적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신념의 기초이다.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의 모든 개념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 즉 제한된 인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육체의 요구,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이용해야만 하는 자연계의 본질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죽어야 할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남, 성장과 노화의 리듬, 노동으로써 세계를 세울 필요성과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성, 이 모든 요인들은 우리가 살기를 바란다면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한다. 육체는 또한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도록 한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존재양식에서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시간에 굴복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시간의 존중이 소유양식이 지배할 때에는 '굴복으로 변한다'. 이 양식에서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존재양식에서는 시간은 왕위(王位)를 상실하고, 이미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지 못한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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