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11, 2024
September 28, 2022
조롱의 인플레이션
삶의 목표로서 명예라는 가치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 행복이 들어서면서 생긴 첫 번째 현상은, 일상적인 모욕 문화다. 론 E. 하워드가 썼듯이, 문명인은 야만인보다 무례한 말을 더 쉽게 한다. 그런다고 머리통이 박살날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상대의 결투 신청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조롱과 모욕에 대한 공적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약하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 수 있다는 이유로 부당한 공격도 제재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모욕을 당했을 때 이것을 법정으로 가져가기보다는 다른 말로 받아치는 것이 권장되는데, 이로 인해 조롱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가 모멸과 굴욕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게 된 한 가지 이유다. -p171
September 7, 2022
저만치
September 19, 2017
- 신현림
괴롭고도 큰 나이구나 서른셋
슬픔으로 슬픔을 해탈할 나이 서른셋
서른세 번의 봄이 와도
몸은 시베리아일 수 있느냐
물항아리에 잠긴 세상과 내 얼굴을 꺼내 읽고
그것이 한다발 시의 심장으로 피게
나는 긴 밤으로 유배돼왔다.
일생은 가슴에 횃불 하나 심어
순교하듯 일하고
사랑하는 이의 몸 속에 가을 무덤을 파는 것
가라앉는 밤바다에
온몸으로 저무는 것이다
나는 고된 노동 끝에 떠오른
만월 같은 밥으로 언 몸을 밝히고
사람을 그리워하기 위해 사람으로부터 떠나며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
강철 밤바다에 창을 뚫는다
목숨을 끊고 싶도록 쓸쓸한 밤에
꿈 속에서 뛰어나오는 야생의 아이들은
폐허에서 죽은 자들을 불러 노래부른다
February 10, 2013
智慧
사고와 분별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그들과 견해를 같이 하였으며 그들과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들의 허영심, 그들의 탐욕, 그들의 유치함이 그렇게 우스꽝스럽지가 않고 오히려 이해할 수 있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심지어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아들에 대해 우쭐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만, 젊고 허영심에 가득 찬 여인이 치장을 하고 남자의 눈을 끌려는 분수 없는 맹목적인 노력, 이같은 모든 충동, 이같은 모든 유치함, 이같은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러면서도 무섭게 강렬하며 힘차게 살아 나가려는 충동과 탐욕도 지금의 싯달타에게는 이미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들이 그것들로 인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들로 인하여 무한한 것을 이룩해 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 인간들의 맹목적인 충실 속에는, 그들의 맹목적인 강인함과 집요함 속에는 사랑스럽고 감탄할 만한 요소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결여된 것이 없었다. 사고하는 지자(智者)가 그들보다 나은 점이란 단 한 가지, 의식하고 있다는 것, 모든 생의 단일성을 의식하여 사유한다는 것뿐, 그밖의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p154
January 17, 2013
last chance to see
"그럼 이 건물은 원래 것이 아닌가요?"
"아니, 맞아요. 원래 것이고말고요."
가이드는 내 질문에 꽤 놀라며 대답했다.
"하지만 타버렸다면서요?"
"맞아요."
"두 번이나요."
"여러 번이죠."
"그리고 새로 지었다고요?"
"네. 금각사는 소중한 역사적 건물이죠."
"완전히 새로운 재료로 지었고요."
"당연하죠. 다 타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이게 예전과 같은 건물이라는 건가요?"
"이건 늘 같은 건물이죠."
사실 가이드의 시각이 좀 뜻밖의 전제에서 나왔다 뿐이지 훨씬 더 이성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건물의 핵심이자 불변인 요소는 개념과 의도, 설계이다. 건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원래 건물을 지은 이의 의도이다. 처음 지었을 때 들어간 목재는 썩게 마련이고 필요하면 교체된다. 지을 당시에 썼던 재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과거에 대한 감상적인 추억에 매달리는 것으로 건물 자체는 보지 못하는 행위이다. -p244
January 15, 2013
서리
.. 존재는 어떤 점에서 시간, 혹은 순서의 문제인지 모른다. 앞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앞섰느냐는 건 물을 필요도 없고, 세계를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존재한 모든 것들(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연이든 사건이든 현상이든, 무엇이든)은 그에게 그곳을 이루는 요소들, 그곳의 일부로 인식된다. 그보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역시 그곳을 형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인식될 것이다. 전자에게 모든 후자들은 덧붙여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밀 아자르 식으로 말하면,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다'. 반면에 후자에게 모든 전자들은 세계를 이루는 존재, 곧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고 참견할 수 없다. 다만 참여하거나 아주 드물게 참여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정황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 일이어서 보통 사람이 시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나'에 앞서 '나의 삶의 정황'이 존재한다. 내가 나의 정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정황 속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세계는 나에 앞서 이미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존재에 선행한다. .. -p29
.. '너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만일 날개를 가지고 있다면.' 이라는 문장과 이 구조는 같다. 통째로 주어진 무한한 자유는 그러나 따라붙은 조건문의 제한에 의해 무의미해진다. 유사하지만 더 근본적이고 명쾌한 전언이 러시아의 문호에 의해 이미 말해졌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가운데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이 말을 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의 존재는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대자유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라는 대전제에 의해 곧바로 회수된다. .. -p34
October 1, 2012
유배
August 23, 2012
timeless
June 9, 2012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은 그 이상의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능력Konnen의 긍정성은 당위Sollen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사회적 무의식은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다. ..
알랭 에랭베르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알랭 에랭베르는 오늘날의 인간형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Schaffens- und Konnensmu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 -p29
March 8, 2012
Sebaldian
전설에 따르면 나의 수호성인은 다키아(고대에 다키아인이 살던 지역으로 현재 루마니아 영토다) 혹은 덴마크 출신의 왕자였는데, 빠리에서 프랑스 여왕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식 날 밤, 그는 지극한 무상의 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봐, 오늘은 우리 몸이 이렇게 꾸며져 있지만, 내일이면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지.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벌써 도망 길에 오른 그는 남쪽 이딸리아로 순례를 떠나 거기서 은둔자의 삶을 살다가 이윽고 자신 안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음을 느꼈다. ... 어쨌든 나의 수호성인은 나중에 레크니츠 강과 페그니츠 강 사이의 라이히스발트(뉘른베르크 근처의 숲지대)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을 치유한 끝에 자신이 죽기 전에 남긴 뜻대로 두 마리의 충직한 황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지금도 그의 무덤이 있는 그곳으로 옮겨졌다. -p106
October 24, 2011
E. Lévinas in the movie 'Before Sunrise'
'나는 그 어떤 것도 신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신이지, 그 역은 아니다. 내가 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나는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의 현존(existence)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신의 추상적인 관념은 인간적 상황을 명백하게 해줄 수 없는 관념이다. 반대로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 준다.' -p129
October 8, 2011
1914년
September 30, 2011
September 29, 2011
September 27, 2011
자격과 권리
.. 우리 중 상당수는 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자질을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행운을 누린다. 그렇다 보니,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다. 관료사회에서는 상사와 무난히 잘 어울린다.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화면을 잘 받으려 노력하고, 짧고 내용 없는 말을 잘 지어낸다. 소송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거나,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을 키운다.
우리 사회가 그런 것들에 가치를 두는 현상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p227
July 5, 2011
감히 닮고 싶은 그대, 러셀
July 1, 2011
June 6, 2011
춤꾼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는 특별한 전투 기술을 전제로 한다. 춤꾼이 행하는 전투, 퐁트벵은 그것을 <도덕씨름>이라고 부른다. 춤꾼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누가 그보다 도덕적이라고(좀더 용기있고, 좀더 정직하고, 좀더 성실하고, 좀더 희생적이고, 좀더 진실하다고) 자처할 수 있는가? 그는 상대를 자기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상황에 처하게 할 갖은 기술을 다 쓴다. -p25
벵상이 퐁트벵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당신이 베르크를 혐오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바이고 우리도 당신 생각에 동의하고 있어요. 하지만, 비록 그가 멍청이라곤 해도, 그는 우리 역시 정당하다고 여기는 주장들을 내세웁니다. 아니면, 그의 허영심이 그런 주장들을 내세운다고 해도 좋겠죠. 그래서 묻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떤 대중적 갈등에 개입하여, 어떤 가혹한 처사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박해받는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당신이라고 어찌, 이 시대에, 춤꾼이 아닐 수 있거나 혹은 춤꾼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에 대해 신비의 인물 퐁트벵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춤꾼들을 공격하려 한 줄로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야. 나는 그들을 옹호한다네. 춤꾼들에게 혐오를 느끼고 그들을 비방하려 드는 자는 언제나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에 직면할 걸세. 그들의 정직성 말이네. 끊임없이 스스로를 대중에게 전시하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춤꾼은 비난할 수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네. 그는 파우스트처럼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 천사와 계약을 맺은 거야. 그는 자신의 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 작업을 천사가 돕는다네. 왜냐하면, 잊지 말게, 춤은 예술이기 때문이야! 자신의 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의 소재로 보려는 그 강박 관념 속에 춤꾼의 참 본질이 있어. 그는 도덕을 설교하는 게 아니라, 도덕을 춤춘다네! 그는 제 삶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감격시키고 눈부시게 하려는 거라네! 그는 마치 조각가가 자신이 조각중인 조각상을 사랑하듯 제 삶을 사랑한다네」 -p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