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 2011

무진과 창야


 루쉰(魯迅)의 여러 작품 중 '고향(故鄕)'이 제일 좋다. 조금 교조적이지만, 사변적이진 않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의 침묵의 세계(Die Welt Des Schweigens)를 읽었는데, 최승자씨의 번역이었다.

 「사람들은 아마도 침묵에 대하여 무엇인가 말로써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상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스러워 하는 것은 다만, 침묵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無)로서 이해할 때뿐이다. 그러나 침묵은 "존재"이며 하나의 실체이며, 그리고 말이란 그 어떤 실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 무목적적인 침묵은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의 곁에 있다. .. 그 무목적성으로써 놀라게 만들고 목적 지향적인 것의 흐름을 중단시킨다. .. 그것은 사물들을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현존재의 세계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사물들을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사물들에게 성스러운 무효용성(無效用性)을 준다. 왜냐하면 침묵 자체가 무효용성, 성스러운 무효용성이기 때문이다.」

 김탁환, 김훈, 박범신을 읽었다. 오, 김훈! 김훈.
 실로 던적스러워 '작가의 말' 이외엔 한 문장도 옮길 수 없다.

 「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나는 왜 이러한가. 이번 일을 하면서 심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쓰기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 남은 시간들 흩어지는데, 나여,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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