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가는 길. 전북 부안을 지난다. 들판은 푸르고 두루미가 난다. 장마와 폭염 사이 어디쯤에 흩어진 구름. 무의미한 풍경과 무의미한 여행.
2012년에 미황사에 머무른 적이 있다. 절, 참선, 산책과 차담. 뒷산에 오르면 해 지는 바다가 용암처럼 보였다. 바쁜 척 잊고 살다가도 취한 날이면 당시 냄새와 소리가 떠올랐다. 문신같은 기억들이 있지 않나. 첫사랑은 손가락에, 그의 죽음은 무릎에... 4년전 그때의 며칠은 내 배꼽 바로 밑 어딘가에 새겨졌나보다.
대형 병원의 교수가 되어 내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며 사는 것도 가치있는 인생일 것이다. 존경받으며, 가족과 함께 풍요롭게 나이드는 삶.
십 년 전 나는 지금쯤이면 내가 수미산같이 단단한 사람이 되어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장대비 속 하루살이처럼 흔들릴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어야지. 스님께 묻고 내게 묻고 숲에서 묻고 버스에서 묻고. 그리고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온 후엔 절대 고민하지 말아야지.